재앙 같았던 시간이 마침내 끝난 뒤 남은 성적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팀타율은 .245는 그렇다고 쳐도, 장타율 부분에서는 바로 위의 SK보다도 무려 5푼이 낮은 3할 3푼대를 마크하며 공격에서 돌파구를 전혀 찾지 못했다. 대체 외인으로 데려온 반즈가 시즌의 절반 정도인 74경기만을 뛰었음에도 팀 공격 지표 상위권을 휩쓸었고 팀 내에서 감히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산했다.
시즌이 끝난 뒤, 많은 베테랑 선수들과는 이별 수순에 들어갔고 시즌 후반부에 보여준 저연차 선수들 위주의 타선개편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됐다. 좋은 활약의 이용규도 보장계약기간 종료 후 내보내면서 타선에 최재훈을 제외하면 내세울 선수가 마땅치 없은 형편이 됐고, 때늦은 세대교체로 어수선한 가운데 2021시즌 타선 전망도 어두운 상황이다. 현장의 수장으로 외인 감독인 카를로스 수베로를 선임하고 주요 코치들을 외인으로 채우면서 개편의지는 확실히 보여줬지만 아직 갈길이 먼 상황이다.
어려운 타선 속에 외국인 선수의 존재감이 더욱 절실한 상황. 이 중요한 역할은 투수친화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불리함 속에서도 장타력을 증명해온 타자 라이언 힐리가 맡게 됐다. 콜리세움 구장과 세이프코필드에서 한 시즌 25홈런, 24홈런을 쳐낸 경력을 갖고 있어, 이번 스토브리그에 새로 합류할 외국인 타자들 중 네임밸류로는 최고를 다툴 선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단 한 명의 합류가 많은 것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믿고 맡길 선수가 없는 상태의 한화 타선에서 공격력의 검증도 받았고 이름값도 충분한 힐리가 경험이 많지 않은 동료들의 우산이 되어줘야 한다. 역대 최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한화 타선에 합류해 앞으로의 리빌딩 초석을 확실히 다져줄 중심축으로 낙점된 그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타선 리빌딩 첫 단추가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HISTORY
야구기록실 KBReport.com(케이비리포트)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지명받지 못했지만, 오레곤 대학교 진학 이후로는 해마다 3할 타율을 유지하며 핵심선수로 활약했다. 1-2학년 때는 대학 여름 리그에도 참가해 마이크 야스트렘스키, 애런 저지 등과 같은 팀 소속으로 그라운드를 누비기도 했다. 3학년 때 59경기에 나와 .333 .408 .566의 타출장을 기록하고 11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가치를 올려 오클랜드에 3라운드 지명을 받기에 이른다.
대학여름리그가 아닌 프로팀의 루키리그와 하위싱글A에서 활약한 초년차 시즌에는 부침을 겪으며 2할 3푼대 타율에 홈런만 겨우 6개를 쳤을 정도로 미미한 활약을 보였지만, 이듬해부터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2014시즌 상위싱글A에서 .285의 타율과 16홈런 83타점을 곁들이며 첫 시즌의 부진은 일시적이었던 것임을 보여줬고, 더블A로 올라온 2015시즌 역시 3할 타율과 두자릿수 홈런에 성공해 자신을 알렸다.
하지만 성적이 좋았음에도 콜업이 없어 2015시즌을 통째로 더블A에 머무른 것도 모자라 16시즌 초반까지도 그는 트리플A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맹타를 휘두르며 36경기만 홈런 8개와 1이 넘는 OPS를 기록하며 묵묵히 자신을 보여줬고 한 달만에 트리플A 무대를 밟았다. 트리플A에서도 .318의 고타율을 유지하며 여기도 자신의 무대로 삼기엔 좁다는 점을 어필한 힐리는 2개월만에 마이너리그 졸업장도 손에 넣었다.
올스타전 열기가 화려하게 막을 내린 7월 중순 그는 생애 처음 메이저리그 무대에 설 기회를 받았다. 9번타자 3루수로 첫 선을 보인 힐리는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5번 타순에서 차츰 자리를 잡더니 시즌 막바지엔 3번 타순에 자리잡을 정도로 좋은 타격감을 유지했다. 그 결과 출루율은 조금 낮았지만 13개의 홈런과 .305의 타율로 이 시즌 지구 최하위로 떨어졌던 오클랜드 팀에서 기대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 풀타임에 도전했던 2017시즌에는 개인 최다인 25홈런과 .270대 타율을 기록하며 성적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활약을 유지했다. 하지만 수비에서의 허점이 드러난데다 팀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했고 현 시점에서도 자체생산 선수로서 팀의 중심에 서 있는 1루수 맷 올슨과 3루수 맷 채프먼 체제가 시작되면서 힐리는 준수한 성적을 올려놓고도 자리를 내줘야할 입장에 놓였다. 그 결과 1루수가 급했던 지구 라이벌 시애틀이 힐리를 데려가면서 아쉬운 이별을 하고 말았다.
수년간 1루에서의 공격력을 아쉬워한 시애틀은 힐리가 그 답이 되어주길 원했지만, 이 시즌을 기점으로 약점을 노출한 그는 공갈포로 전락하고 말았다. 24개의 홈런을 쳐냈을뿐 타율이 하락하니 원래도 타율에 비해 높지 않아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출루율도 같이 나빠지고 장타도 많이 치지 못했다. 반등을 다짐하며 맞은 2019시즌 도쿄돔 개막 시리즈에서 홈런 1개 포함 3안타 맹타를 휘두르며 팀을 설레게 했지만 다시 공갈포의 모습만 노출했고, 장기부상을 당하며 일찌감치 시즌을 접었다.
시애틀에서 방출된 힐리는 밀워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개막전 로스터 진입 실패를 포함 단 나흘 동안 메이저리그 경기에 모습을 비췄다. 한 달이나 실전을 치르지 못했음에도 커쇼 상대 깜짝카드로서 와일드카드 시리즈 2차전의 4번타자에 나서기도 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쓸쓸히 시즌을 마무리했다. 부상과 기량저하에 발목이 잡힌 힐리는 새로운 무대로 눈을 돌렸고, 일찌감치 계약을 마무리지으며 한국에서 야구 커리어를 재개하게 됐다.
# 플레이스타일
야구기록실 KBReport.com(케이비리포트)
공격성이 돋보이는 스윙은 정확성과 파워를 겸비한 것으로 메이저리그 커리어 초기에도 그를 기대주로 올렸을 정도로 확실한 장점이었다. 물론 시프트 파훼 실패 등으로 인해 타율이 무너지며 메이저리그에서 오래 버텨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극단적인 당겨치기 편향이나 지나친 적극성 이외에는 흠잡을 면이 없는 공격 측면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또 이러한 스윙에서의 자신감이 있어 적극성도 좋은 쪽으로 풀렸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스윙 스타일의 반작용으로서 선구안은 기대를 할 수 없다. 볼넷-삼진의 비율은 마이너리그에서부터 무너져 있었고 그 결과 마이너리그에서나 메이저리그에서 출루율 차이는 4푼 언저리로 거의 비슷했다. 따라서 질 좋은 타구를 만들지 못하면 그대로 타격이 무너져내린다.
수비에서는 기대치를 가질만한 선수가 아니다. 모든 수비스탯을 통틀어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시즌은 기껏해야 디펜시브런세이브가 유일하게 양수였던 2016시즌(637⅔이닝) 뿐이다. 처음 데뷔한 이래 5시즌 중 실질적으로 뛴건 3시즌에서 4시즌 정도인데 1루와 3루 포지션 모두 통산 기록에서 두자릿수 음수의 디펜시브런세이브가 나오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주로 뛸 1루에서는 MLB에서만 1500이닝 동안 필딩율 .993이 나왔는데, 1루 포구나 본인 근처의 타구에 대해서는 안정적인 처리는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엉덩이와 다리 쪽 부상에 시달린 탓에 주루에서는 이제 전혀 기대를 할 수 없게끔 되었다. 이미 2018시즌부터 주력 감소 징후가 나타난 가운데 올해 4경기에 그치긴 했지만 25피트 초반대까지 나오면서 최악의 스피드 쪽으로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25.1피트 - 하위 14퍼센트) 부상의 여파로 느려진 스프린트 속도인만큼 부상 회복의 증표를 위해서라도 2018시즌의 수준까지는 회복됐음을 보여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정리하면 큰 틀에서는 타격에 장점이 몰려있고 주루와 수비는 뒤떨어진 전형적인 클래식 거포 유형의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세부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크게 차이가 나는데, 기본적으로 투수들에게 압박감을 줘서 본인 자체의 선구 능력보다 많은 볼넷을 얻어내 OPS형 타자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이러한 유형 타자들과는 달리 참지 않고 적극적으로 스윙을 가져가 타구 결과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다. 따라서 성공-실패에 따라 성적 편차가 더 크고, 출루율은 등한시하여 세이버에서도 평가는 좋게 받기 힘든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 KBO 외인 선수와의 비교
야구기록실 KBReport.com(케이비리포트)
실전감각이 저하된 채로 한국 무대에 합류해 기대만큼 장타력을 뽐내지는 못했지만, 반즈는 타선에서 중심으로 어느정도 기대치를 만족시켜줬다. 공을 기다리기보다는 타격을 이루고 결과를 기다리기를 선호하는 타입으로 힐리와 유사성을 가진 바 있다. 반즈의 경우 코로나 여파로 인한 실전감각 부재로 트리플A 시절의 성적을 재현하지 못했는데, 지난 2년간 50경기를 겨우 소화한 힐리 역시 경기력 측면에 물음표가 달려있다. 그 감각을 얼마나 빠르게 되찾을지가 성공을 가늠하는 1차 관문이 될 것이다.
페르난데스 또한 힐리처럼 만능 스윙을 가진 타자인데, 파워에서 돋보이진 않지만 컨택에 좀 더 치우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좋은 타구를 생산하는데는 힐리가 더 뛰어날 순 있지만, 결정적으로 볼넷과 삼진 비율이 망가진 힐리와는 다르게 삼진도 좀처럼 당하지 않아 투수에겐 더 까다로운 유형이다. KBO에서는 아예 볼넷이 삼진보다 더 많고 안타를 생산하는 능력이 탁월해 홈런 생산성이 떨어짐에도 투수들에게 큰 부담을 안긴다. 모든 레벨에서 3할 타율을 넘볼 수 있는 힐리가 페르난데스와 안타 대결을 벌일지도 주목해볼만한 부분이 될 것이다.
NC의 창단 후 첫 우승멤버로 이름을 남긴 알테어는 힐리에게 기대하는 기대치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볼넷과 삼진 컨트롤에선 미국시절에 비해 큰 개선은 없었지만 30홈런과 100타점, 그리고 2할 8푼대 근방의 괜찮은 타율까지 종합적으로 모든 면에서 결과를 내줬다. 특히 한화는 당장은 타선에서 받쳐줄만한 타자가 마땅치 않고 성장세를 기다리는 입장이라 전방위적으로 동료들의 부담을 많이 해결해줘야 하는데, 마이너에서 클래식 스탯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쌓아온 힐리가 그 역햘을 그대로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 관전포인트
▲ 힐리의 타구 히트맵
출처: Baseball Savant
2년 전까지 그를 괴롭힌 부상, 그리고 코로나 여파로 인해 없다시피했던 실전감각 회복기간은 팀 입장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물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상은 완전히 회복이 됐을 순 있겠으나, 마이너리그 전면 취소로 19년 5월 말부터 지금까지 단 5경기 10타석만 소화한 채로 한국에 오는 상황이다. 몸상태로는 자신있을지 몰라도 리햅 경기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실전의 경기력에 우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다. 얼마나 빠르게 자기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를 주의깊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역사에 남을 정도의 부실했던 공격력에, 다음 시즌 개편된 라인업에서도 공격에서 크게 기대할만한 자원이 많지 않아 다른 어떤 선수들보다도 강한 집중견제가 들어올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 이번 기회에 가장 많은 볼넷을 얻어낼 것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는 스트라이크존에 정직하게 들어오는 공을 많이 주지 않을 것이다. 치기 좋은 공 대신 유인구의 유혹이 많이 들어올 것인데, 나쁜 공에 휘둘리지 않을 침착성도 발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힐리의 타구발사각도
출처: Baseball Savant
그가 침착하게 공을 지켜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배트를 내고 결과를 만드려는 성향이 있는 이유는 그만큼 스윙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이너리그는 물론이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후반기 3할 타율, 한시즌 풀타임 .270의 타율도 올려본 적이 있어 정확성도 무기로 할 수 있다. 실제로 기록을 놓고 보면 커브에만 약했을뿐 다른 구종은 빅리그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대응력을 갖추고 있어, 하위리그인 KBO에서 적응만 잘하면 자유자재로 타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대치대로라면 리그 최고의 컨택 타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데 최고의 타격기계를 가리는 경쟁에 참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힐리를 영입하는데는 투수친화구장을 홈으로 대부분 쓰면서도 좋은 장타력을 보인 점을 높이 평가한데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김응용 감독 시절 펜스를 뒤로 무르는 조치를 취하면서 대전구장은 타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구장에서 어려움을 안기는 구장으로 특성이 바뀌었다. 한화 타선의 지속적인 약세에 한몫하기도 했던 홈구장인데 오클랜드 콜리세움과 시애틀 세이프코필드를 홈으로 쓰면서 2할에 육박하는 순수장타율을 기록한 파워가 대전구장도 삼킬 수 있을지 기대가 큰 상황이다.
타석에서만큼은 여러 가지를 해낼 수 있는 스윙을 가진 선수로 한화가 점찍고 모셔온 힐리.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팀 상황은 가시밭길이다. FA를 통한 외부 전력보강을 꿈꿨지만 정수빈 협상이 좌절되면서 사실상 철수 상태라 더더욱 타선은 힐리만을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힐리는 한화 공격력을 하드캐리할 수 있을까. 한화 타선의 정상화를 향한 첫 발걸음을 이끌어야할 그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