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황재균-히메네스, 홈런더비의 희생양?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이후 부진에 시달렸던 타자들은 누구?
흔히 홈런을 ‘야구의 꽃’이라 한다. 타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화끈한 탈삼진쇼, 찰나의 순간 베이스를 훔치는 도루, 몸을 날려 타구를 잡아내는 호수비도 멋지지만, 야구팬들을 가장 열광하게 하는 것은 창공을 가르며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다. 야구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도 당대의 홈런 타자들의 이름은 알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일까? 올스타전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이벤트 역시 '홈런레이스다. 리그를 대표하는 장타자들이 차례로 나와 홈런 타구를 펑펑 날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켠이 후련해진다. 번트왕, 퍼펙트 히터-피처 등 올스타전의 이벤트가 점점 다양화되고 있지만, 올스타전의 백미는 역시 홈런 레이스다.
하지만 그 관심의 정점에 서는 것, 바로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의 화려한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전반기 홈런을 펑펑 때려내던 선수가 홈런 레이스 우승 뒤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종종 보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홈런 더비의 저주’라 불리는 징크스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저주의 희생양이 된 선수들의 전반기와 후반기 성적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였을까? 2010년대 ‘올스타 홈런왕 저주’의 희생양으로 꼽히는 선수들의 면면을 확인해 보자.
#1. 2011시즌 박정권 – 꺾인 상승세의 기억
2011시즌 당시 박정권은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타자였다. 그는 2009시즌 25홈런 76타점으로 폭발한데 이어 2010시즌 18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우승팀 SK의 중심타자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2009시즌 플레이오프 MVP, 2010시즌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는 등 가을에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이며 ‘가을 정권’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당연히 2011시즌에 대한 기대 역시 컸다.
전반기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타율은 0.270으로 다소 낮았지만 전반기 9개의 아치를 그리며 최정(12홈런)에 이어 팀 내 홈런 2위를 기록했다. 3년 연속 15홈런은 물론, 2년만의 20홈런도 노려볼 만한 페이스였다.
이어진 올스타전에서는 홈런레이스 우승까지 거머쥐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다. 생애 첫 올스타전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그는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이 아닌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하지만 홈런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성적이 급격히 떨어졌다. 후반기 들어 타율 0.221, 4홈런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시즌 최종 타율 0.252에 13홈런 53타점 OPS .710으로 마감했다. 팀의 4번타자가 부진하자 SK의 우승 행진에도 제동이 걸렸다.
SK는 선두 삼성과의 격차를 줄이지 못한 채 리그 3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한국시리즈 우승 역시 삼성에 내줬다. 박정권은 ‘가을 정권’이라는 별명답게 포스트시즌 3홈런 9타점으로 활약하며 명예 회복을 노렸지만, 정규시즌 후반기의 부진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2011시즌 홈런레이스 영상
#2. 2012시즌 김태균 – 날아간 4할의 꿈
2012시즌 한화는 여러 강팀들을 위협할 다크호스로 꼽혔다. 그 이유는 바로 NPB에서 복귀한 김태균의 합류. 2011시즌 막판 돌풍과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가세 등도 한 몫을 했지만, 역시 가장 기대되는 전력은 김태균이었다.
2008시즌 홈런왕을 차지했고, 2009 WBC에서 홈런, 타점, 득점 1위를 기록한 김태균의 합류는 다수 한화 팬들을 설레게 했다. 시즌이 개막하자 그에 대한 기대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2012시즌 전반기 동안 타율 0.398에 12홈런을 기록하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타율과 안타는 단연 리그 1위였으며, 홈런은 리그 공동 6위. 한화가 마운드의 문제로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4할에 도전하는 김태균의 화끈한 방망이는 전반기 내내 큰 이슈였다.
그의 화끈한 타격 실력은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도 이어졌다. 이미 2005, 2007 홈런레이스 우승 경력을 가진 그는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결승에서 박용택을 꺾고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박재홍, 양준혁만이 기록한 홈런레이스 3회 우승 고지를 점령하며 후반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하지만 그 역시 ‘올스타 홈런왕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했다.
후반기 들어 타율이 곤두박질쳤고, 홈런 페이스는 전반기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경이로운 전반기 활약 덕에 타격왕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4할 타자’의 꿈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김태균의 화려한 복귀 시즌은 그렇게 마감됐다.
#3. 2015시즌 황재균 – ‘용두사미’로 끝난 거포 변신 시즌
2014시즌까지 황재균은 ‘거포’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그는 주전으로 자리잡은 2008시즌부터 2014시즌까지 시즌당 평균 8.57홈런을 기록했다. 2009시즌 커리어 하이인 18홈런을 터뜨리긴 했지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15홈런을 넘기지 못했다.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치는 두 자리 수 홈런 정도였다.하지만 2015시즌 황재균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전지훈련 기간 ‘벌크업’을 통해 파워를 대폭 향상시킨 그는 연신 커다란 타구를 펑펑 날렸다. 전반기가 종료된 7월 16일까지 그가 쏘아올린 홈런포는 무려 22개. 그는 단 85경기만에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훌쩍 넘어서며 거포로 거듭났다.
이어진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도 황재균의 ‘벌크업’은 진가를 발휘했다. 예선전에서 7아웃10홈런으로 결승에 진출한 그는 결승전에서 10아웃 11홈런을 기록, 단 2홈런에 그친 테임즈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에게 머신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테임즈의 평처럼 ‘거포’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선 수식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후반기였다. 올스타전에서 너무 많은 힘을 쓴 것일까, 그는 후반기 들어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후반기 들어 그가 쏘아올린 홈런은 고작 4개 뿐. 전반기 22홈런에 비해 1/5 수준으로 추락했다. 시간 문제로 보였던 30홈런 달성 마저 실패했다. 2015년 황재균의 ‘거포 변신' 은 용두사미로 마무리되며 유종의 미를 거두진 못했다.
# 황재균에게 멋진(?) 별명을 선사한 테임즈
#4. 2016시즌 히메네스 – 백일몽이 된 ‘잠실 홈런왕’
잠실구장은 KBO리그에서 가장 넓은 구장이다. 당연히 홈런이 나올 확률이 가장 낮으며, 잠실을 홈으로 사용하는 LG와 두산은 홈런왕 타이틀과 거리가 멀다.
2015시즌까지 34년 간 LG는 단 한 명의 홈런왕도 배출하지 못했으며 두산은 두 명의 홈런왕 만을 배출했다. 2016 시즌을 앞두고도 ‘홈런왕 후보군’에 양 팀 선수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고 예상치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LG 외국인 3루수 히메네스가 4월 한 달간 9홈런을 폭발시키며 단숨에 홈런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홈런포를 가동하며 줄곧 선두권을 유지, ‘잠실 홈런왕’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그의 홈런 개수는 무려 22개. 에릭 테임즈(25홈런)에 이어 전반기 홈런 2위였다.이어진 올스타전에서도 히메네스의 ‘거포 본능’은 여전했다. 그는 올스타 홈런레이스 결승에서 박경수와 맞붙어 5개의 아치를 그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LG 타자가 홈런레이스에서 우승한 것은 2004시즌 박용택 이후 무려 12시즌만. ‘거포 갈증’에 시달리던 LG 팬들은 그의 홈런 파워에 환호했다.
지난 수 년 간 이어진 ‘올스타 홈런왕의 저주’에 대한 찝찝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18년만의 ‘잠실 홈런왕’이자 최초의 ‘LG 홈런왕’ 대한 기대가 더 컸다. 하지만 히메네스 역시 ‘올스타 홈런왕의 저주’를 피해가진 못했다.
후반기 두번째 경기에서 홈런포를 가동하며 저주를 피해가나 싶었지만, 이후 25경기 무홈런이라는 긴 침묵에 빠졌다. 그의 후반기 홈런 개수는 고작 4개 뿐. 전반기 종료 시점 2위였던 그의 홈런 순위는 결국 12위까지 떨어졌다. 공동 홈런왕을 차지한 테임즈, 최정과 그의 격차는 무려 14홈런이었다.
한편, 전반기 그와 동일한 22홈런을 터뜨렸던 두산 김재환은 후반기 15홈런을 추가하며 시즌 37홈런으로 홈런 3위를 차지했다. 히메네스와 김재환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어쩌면 ‘올스타 홈런왕의 저주’가 아니었을까?
#박경수를 꺾고 홈런레이스에서 우승한 히메네스
# 2017시즌 올스타 홈런레이스, 이번에는 다를까
앞서 언급한 사례 이외에도 홈런레이스 우승 이후 타격감이 하락한 경우는 더 있다. 2013시즌 우승자인 이승엽(10아웃 6홈런)과 2014시즌 우승자 김현수(10아웃 14홈런)는 후반기 들어 타율은 소폭 올랐지만, 홈런 생산을 급격히 줄었다.
2010시즌 우승자 김현수(7아웃 10홈런)는 오히려 후반기 성적이 더욱 좋았다. 후반기 들어 정확성과 장타력 모두 발전된 모습으로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그 역시 올스타전 직후 13경기 연속 무홈런에 그치는 등 한동안 ‘올스타 홈런왕의 저주’에 시달려야만 했다.
선수들마다 그 기간은 다르지만, 극단적으로 홈런을 노리는 스윙이 이후 타격 밸런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러 정황상 분명해 보인다 .
이 점 때문인지 홈런레이스 출전을 기피하는 타자들도 적지 않다. KBO리그에서 홈런레이스를 경험한 바 있는 에릭 테임즈 역시 “MLB 올스타전 홈런더비에 초청받았더라도 고사했을 것”이라며 홈런 레이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기도 했다.
14~15일 이틀에 걸쳐 펼쳐지는 ‘2017 홈런레이스’에는 드림 올스타에서 4명(두산 에반스, SK 최정-한동민, 롯데 이대호), 나눔 올스타에서 4명(NC 나성범, KIA 최형우, 한화 김태균-로사리오)이 출전한다.
전반기 20홈런을 넘긴 5명(최정, 한동민, 최형우, 로사리오, 김재환) 중 4명이 참가하며, 다른 타자들도 모두 시즌 10홈런 이상을 넘긴 선수들이다. 누가 우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전반기를 보냈다는 뜻.
과연 올해 홈런레이스의 우승자는 2010년대 들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올스타 홈런왕’의 저주라는 징크스를 깰 수 있을까? 이틀에 걸쳐 펼쳐질 홈런 레이스와 그 우승자의 후반기 성적에 주목해 보자.
[기록 출처: 야구기록실 KBReport.com, KBO 기록실, STATIZ]
계민호 기자 / 정리 및 편집: 김정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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